지극히 사적인 페미니즘
박소현, 오빛나리, 홍혜은, 이서영
2017-07-31
232
135*210 mm
979-11-85585-37-6 (03330)
13,5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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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이어야 마땅한 페미니즘

“여성이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 어떤 형태로 숭배되고 배제당하는지, 보편적인 여성은 무엇이며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탐구하는 것만이 페미니스트의 일은 아닙니다. 페미니스트를 자임하는 건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돌아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서문 중에서)

나이, 성장 환경, 경제적 조건, 종교, 정치적 입장까지 모두 다른 네 명의 저자가 털어놓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에는 여성으로서 겪는 성차별, 타자화, 가부장제, 남성중심주의의 질긴 뿌리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프리랜서 출판편집자 박소현, 고양예고 문예창작과 졸업생 연대 ‘탈선’의 대표 오빛나리, 문학을 전공하다 망했다고 자조하는 넷페미니스트 홍혜은, 소설가 이서영은 자신의 삶에 얽히고설킨 그 뿌리들을 질문과 사유의 힘으로 헤치고 나와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직시한다. 직시는 자신의 삶에 대한 온전한 ‘독대’로써 가능하지만 그러한 직시가 모이면 ‘연대’가 가능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연대의 증거물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은 학문이기 이전에 우리의 삶이다. 성차별과 가부장주의로 점철된 우리 사회의 공고한 이데올로기를 이론의 영역에서 해체시킬 수 있지만 그러한 문제의식의 계기는 우리의 삶에 단단히 발을 붙이고 있다. 학문적 영역의 페미니즘 연구 주제가 연구자 자신의 삶과 직결되어 있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것 또한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페미니스트는 사회를 비판하기 이전에, 또는 동시에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밖에 없다.

 

평범한 여성들의 치열하고 사사로운 이야기가
질문과 사유를 만나 사적인 페미니즘이 되었다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 일 년이 지났다. 최근 또 한 번의 여성혐오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여성 혼자 운영하는 왁싱샵에서다. 가해자는 인터넷 방송을 통해 그 왁싱샵이 여성 혼자 외진 주택가에서 운영하는 곳임을 알고는 손님을 가장하고 찾아가 살해했다. 이 사건에 대한 세간의 반응은 강남역 살인사건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가해자가 조현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며 여성혐오가 아닌 ‘묻지마 범죄’라 외쳤던 당시의 목소리와 ‘그러게 왜 여자 혼자 겁도 없이’를 말하며 혼자서 왁싱샵을 운영한 피해자를 탓하는 목소리는 닮아 있다.

그러게 왜 여자 혼자 겁도 없이. 그 말 한마디로 ‘공적 영역’에서 다뤄져야 할 문제는 순식간에 ‘사적 영역’으로 밀려나고 축소된다. 여성들이 각자의 삶에서 경험하는 성차별과 대상화가 개개인들의 특수한 ‘사적 영역’의 일로 치부될 때, 수많은 여성 문제는 보편적인 사회의 문제로 논의되지 못한 채 배제된다.

프리랜서 출판편집자 박소현, 고양예고 문예창작과 졸업생 연대 ‘탈선’의 대표 오빛나리, 문학을 전공하다 망했다고 자조하는 넷페미니스트 홍혜은, 소설가 이서영은 그 밀려남과 축소, 은폐의 장막을 걷어내기 위해 목소리를 모았다. 이 네 명이 가진 이력의 다양함만으로도 연대의 힘은 증명된다. 같은 곳에 서 있지 않아도, 같은 미래를 그리지 않아도, 같은 방식으로 싸우지 않아도 우리는 같은 질문을 공유할 수 있다. ‘여성’이 아니라면 치열하게 사유하지 못했을 질문들이 결혼, 게임, 가난, 노조의 네 갈래로 던져진다.

 

결혼, 게임, 가난, 노조
당신의 페미니즘은 지금 어디에 서 있나요?

[‘○○맘’이기 이전에 ‘나’로 존재하기]

박소현은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는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 그러나 가부장제의 성은 견고하기만 하다. ‘시댁’을 ‘시가’로 부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 결혼 생활이지만 현실은 가시밭길, 고난의 연속이다. 결혼과 동시에 ‘며느리’라는 이름표를 달고 가장 낮은 곳에 마련된 자리를 배정받는다. 입덧의 고통은 임신부가 겪어야 할 고충쯤으로 여겨지고, 산모의 의견만으로는 제왕절개수술을 허락받기도 힘들다. 아이를 위한 헌신과 사회적 성취 둘 다를 해내는 여성이 가장 이상적인 기혼 여성상으로 받아들여지는 한국 사회. 누구의 아내이자 ‘○○맘’이기 이전에 그저 ‘나’로 존재하고자 분투하는 박소현의 일상에는 자연스레 ‘82년생 김지영’이 겹친다.

 

[우리 팀에 여자 있어? 아, 망했네]

여성 게이머란 어떤 존재인가? ‘전장의 영웅’이 전제하는 인간상이란 언제나 남성이었다. 오빛나리는 단지 ‘대상’이자 ‘부속’으로 다뤄지는 게임 속 여성 캐릭터들, 함께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들이 휘두르는 숱한 대상화와 성차별에 고군분투하며 오늘도 게임을 한다. 전장 상황을 빠르게 공유하기 위한 음성 채팅 기능은 여성 플레이어들에게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다. 게임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릴 때 돌아오는 수많은 차별적 발언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응하기 위한 여덟 가지 방법을 ‘최후의 방어 수단’이라 부르는 저자는 〈오버워치〉라는 게임 세계에서 튀어나온 현실의 파편들에 맞은 수많은 상처들을 마주하며 그것이 더 이상 개인의 상처일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이제 새로운 전장을, 좀 더 신나는 세계를 상상해야 할 때다.

 

[엄마의 문장들은 엉망이었다]

착실한 ‘개념녀’를 꿈꾸다 페미니스트가 되기까지, 홍혜은은 그 기막힌 우연성과 정체화의 과정을 가감 없이 털어놓는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어쩌다 진학한 여대에서의 이듬해에 맞이한 페미니즘 리부트. ‘여성’이라는 사실이 그 어떤 조건으로도 작용하지 않는 곳에서 생활한 경험은 세상에 대한 인식 자체를 페미니즘적으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홍혜은의 이야기는 엄마의 서사와 떼놓을 수 없다. 십 년 동안 다섯 남매를 낳느라 끊임없이 임신과 출산을 반복한 엄마의 삶을 ‘저소득층 중년 여성’의 삶으로 읽어내는 용기는, 다시는 보지 말자고 다짐했던 모녀를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연대하게 한다. 홍혜은의 ‘자매애’는 폭력이 폭력인 줄 모른 채 맞서는 여성들을 향해 있다.

 

[세상을 바꾸려면 더 많은 동지가 필요하다]

소설가이자 빈곤과 노동에 천착하는 페미니스트 이서영은 이십대 내내 시위를 했다. 한때 운수노조에서 사무직 간부로 일했던 경험 속에는 노동자의 계급성과 젠더가 밀접하게 뒤얽혀 있다. 남성에게 보호를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여성의 생존과도 직결될 수 있는 구조 속에서, 이서영은 늦고 싶어서 늦는 게 아닌 여성들의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는다. 범죄 통계를 끌어오며 남성이 여성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존재인지를 ‘팩트’로 들이밀지만, 그것이 남성을 절멸해야 한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적이 아닌 동지로서의 남성을 계속해서 호명하는 일, 이서영의 페미니즘은 ‘자매애’가 아닌 ‘동지애’의 선상에 있다.

 

지금, 거기, 당신의 페미니즘의 가닿기 위해

페미니즘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언어다. IS로 간 김 군이 남긴 “나는 페미니스트가 싫어요”라는 말은 한국의 페미니즘 리부트에 불을 붙였다. 그 불은 메르스갤러리, 트위터에서의 해시태그 운동(#나는_페미니스트입니다, #내가_메갈이다),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의 추모 시위 등으로 번지며 지난 2015년과 2016년을 뜨겁게 했다. 2017년에도 여전한 건 물론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입문서부터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깊이 파고드는 전문서까지, 페미니즘 분야의 책들도 활발히 출간되었다. 페미니즘의 사회적 확장과 낮아진 학문적 장벽 덕분에 이제 페미니즘을 모르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은 ‘알면’ 되는 것일까?

삶은 늘 이념보다 크다. 아는 것과 현실의 괴리가 지나치게 크다는 사실을 체감할 때 우리는 절망한다. 그러니 페미니즘이 ‘아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어쩌면 아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연대하고 나서는 것이 더 중요한 게 페미니즘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꺼내고, 더 많은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사적 영역’으로 치부되었던 여성들의 경험이, 진지한 노동자, 진지한 게이머 등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지극히 사적인 페미니즘’이 더 많은 목소리로 곳곳에서 들려와야 한다.

여성들은 이번에도 운이 좋아 살아남았음을 깨닫고 여전히 그대로인 세상을 향해 함께 분노한다. 그것은 ‘여성’이어서 겪는 일이 아니라고, ‘모든 남자’가 그런 건 아니라는 말 앞에서 할 말을 잃고 무기력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책을 쓴 네 명의 저자는 ‘치명적인 상대와 함께 살아남는 법’을 모색하기 위해 그 분노의 중심에 ‘나’ 또는 ‘너’가 아닌 ‘우리’를 둔다. 제각기의 삶을 가운데에 두고 이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로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지금, 거기, ‘당신’의 페미니즘에 가닿기 위해서다.

“사적인 이야기들이 모여 세상을 향해 함께 물음을 던질 수 있도록.” (서문 중에서)

함께 던지는 물음은 연대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