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을 기르기엔 난 너무 게을러
이종산
2018-07-16
188
118*180 mm
979-11-85585-54-3 (03810)
12,8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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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나 돌보기도 버거운 삶
결국 아무것도 기르지 않는 어른이 됐다
무심하고 게으른 내가 식물을 기를 수 있을까?

드라큘라와 인간의 연애소설 《코끼리는 안녕,》을 시작으로 현실과 판타지를 교묘히 넘나드는 독특한 서사 감각을 내보여온 소설가 이종산이 기르는 삶과 식물을 이야기한다. “나는 뭔가를 돌보는 일에 소질이 없다”라는 고백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그는 자주 반려동물과의 삶을 꿈꿨지만 어려서는 부모의 반대로, 자라서는 스스로의 체념으로 번번이 동경에 머물렀다.
이처럼 제대로 이룬 적 없는 욕망이기에 글로나마 자신을 거쳐간 작은 생물들을 반추한다. 거기에는 할머니가 시골에서 보내준 배추에서 튀어나온 개구리, 학교 앞에서 데려와 길렀으나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병아리, 다리를 다쳐 날지 못하는 걸 발견하고 가족이 함께 돌보다가 다시 풀어준 참새, 집 안의 작은 수조에서 기르던 거북이, 동생의 어항에 있던 한 떼의 물고기, ‘수업 중 금지’라는 공지가 있었을 정도로 전국 초등학교를 휩쓸었던 다마고치까지 다양한 존재들이 있었다.
작가는 기르기의 순간들을 되새기며 그것이 불러일으킨 다양한 감정들 ─ 행복, 우정, 기쁨, 슬픔, 두려움, 이기심, 자기혐오, 그리고 무엇보다 외로움 ─ 을 가만히 살펴본다. 시들시들 죽어가는 병아리의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경험은 트라우마로 남아 언젠가 오고야 마는 반려-존재와의 이별에 대한 두려움으로 깊이 각인됐다. 이렇다 보니 “무언가를 죽이는 건 정말 싫다”고 말하는 이 소설가가 식물을 기르겠다고 마음먹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귀엽다거나 아름답다는 이유로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심이 때때로 폭력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식물을 장식이 아닌 생명으로 대하는 일, 작가가 ‘식물’에 앞서 ‘기르기’를 이야기하는 이유다. 잘해보겠다는 마음, 잘 자랄 수 있도록 마음을 쓰겠다는 다짐, 기르고 돌보는 일에 대한 모종의 책임감으로 그의 식물 기르기는 어렵게 ‘성사’됐다.

 

“지금은 식물원 소설을 쓰는 대신 식물 기르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개나 고양이 입양을 오래 고민했지만 역시 무리다.”

그가 식물을 기르기로 결심하고 나서 양재 꽃 시장에 달려가 데려온 식물은 ‘포켓러브’다. 하얀 꽃이 달린 작은 난으로, 작지만 튼튼해 보이는 모습에 한눈에 반한 그는 ‘포켓러브가 오래 살 수 있도록 잘 돌보기’라는 소소한 목표를 다짐하고 살뜰히 보살핀다. 현관문을 나설 때면 눈 맞춤 인사를 하고, 이름을 지어 부르며 말을 건네기도 하고, 몸집에 비해 화분이 작아 보이는 때가 되면 분갈이도 챙긴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동반 같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햇볕을 쬐게 하느라 한겨울에도 낮 동안에는 밖에 내놓던 것을 깜빡 잊고 잠드는 바람에 동상을 입은 포켓러브가 우수수 떨어뜨린 잎사귀들을 마주하기도 한다. 포켓러브 외에도 튤립 구근과 제라늄 등 또 다른 식물을 사들이고는 게으름을 부리다 심어야 하는 시기를 놓치거나, 성급한 마음으로 봄이 오기도 전에 씨앗을 심었다가 한겨울 찬바람에 싹을 죽이기도 한다. 그뿐이면 다행일까. 축제 때 쓸 장식에 생화를 썼다가 자신이 식물의 세계에서 사형감은 아닌지 애태우기도 한다.
작은 선의와 작은 악의를 고민하며 위로받기도, 좌절하기도 하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작가가 늘 ‘공존’을 숙고하며 사는 사람일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반려동물 입양을 포기한 이유도, 반려식물을 기르기로 결심하는 데까지 걸린 오랜 시간도, 소박한 일상에서 틈틈이 이어나가는 단상들도 이 세상에 저 혼자 존재할 수 있는 건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되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이야기는 읽는 이를 덜 외롭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사랑을 참 좋아해.
하지만 사랑할 것을 찾기란 어렵지.”

소설가 이종산의 전작에는 동물원과 수족관을 각각 배경으로 하는 연애소설이 있다. 그가 펼쳐놓는 이야기에 ‘사랑’이 빠진 적은 없기 때문인지, 이 에세이 또한 사랑 이야기와 멀지 않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기를 식물을 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꽃이라기보다는 대파를 들고 있는 기분”으로 꽃의 실존적 무게를 체감한다. 그 무게가 초래한 뻐근함을 달래기 위해 팔을 주무르는 순간, 평범한 날에도 한 아름 꽃을 건네던 지난 연인이 떠오른다. 여름날 들고 가려면 당장이라도 내팽개치고 싶을 만큼의 무게를 가진 식물은 사랑이 지나가고 남은 마음의 무게와 비슷해서, 바라보기엔 예쁘지만 안고 있으면 어느새 몸 어딘가가 저려온다.
그는 동생이 야광새우를 기르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집에 들여놓은 크고 빈 수조를 보며 ‘무언가 기르고 싶은 마음은 왜 사라지지 않는지’ 궁금해한다. 동물이나 식물과 같은 이종(異種)의 존재를 기르고자 하는 마음은 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 그는 그것이 우리가 단지 사랑할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사실 그가 식물을 기르기 시작한 때도 고립감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다. 길었던 연애의 끝을 보고 난 뒤로 집이나 카페에서 글만 쓰는 전업 작가 생활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그가 식물에 빠져든 계기를 어느 종교에 귀의할 때와 비슷한 이유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불안함이나, 외로움, 고독 같은 것들 말이다. 우리의 삶에서 사랑과 종교의 역할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무언가 기르고 있나요?

“기르기는 행복과 슬픔이 공존하는 일”이라고 이종산은 말한다. 관계를 맺으며 복잡한 감정들을 배우는 일이니 우정이라 할 수도 있겠다고 말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한 번쯤은 이종과의 우정을 꿈꾸지 않았을까?
혼자 있으면 기어이 외로움을 느끼고야 마는 인간은, 그래서 동물이든 식물이든 다른 생명을 자꾸만 곁에 두고자 하는 인간은, 결국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다. 줄곧 연애 이야기를 써온 소설가 이종산 또한 첫 에세이를 통해 자신의 독립 불가능성을 고백한 셈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고백은 우리 모두의 일기장에 적혀 있을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상의 속도가 아닌 제 몸에 맞는 속도로, 축축한 땅속에서도 싹을 틔워 줄곧 빛을 향해 자라나는 일. 많은 사람들이 반려식물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데는 식물의 성격을 닮고 싶은 소망 또한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식물을 기르기엔 너무 게으른 소설가 이종산은 지금도 식물을 기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