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시위
김경주, 제이크 레빈, 김봉현, MC메타
2018-10-31
212
140*220 mm
979-11-85585-60-4 03810
12,8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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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이란 원래 인간의 목소리로 전달돼온 공명

랩이란 고통 받는 삶 속 가장 현대화된 고백 양식

세상을 흔드는 목소리, 포에트리 슬램

 

시와 랩이 만나 폭발적인 힘을 분출한다. 얼핏 보면 내밀한 자기 고백을 진술하는 시와 솔직하고 분방한 언어로 행동하는 랩은 너무나 달라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언어예술의 최전방에서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운율을 실험해온 현대시는 ‘가장 현대화된 고백 양식’으로서의 랩과 비슷한 점이 많다. 이러한 문학적인 랩, 혹은 비트 위의 시는 “포에트리 슬램”으로 불리며 미국과 유럽의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시인 셰인 코이잔Shane Koyczan이 집단 괴롭힘에 반대하는 내용의 포에트리 슬램을 낭독해 유튜브에 올린 영상은 2,000만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했고, 그의 영향으로 TED에서도 포에트리 슬램이 주효한 방식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책은 포에트리 슬램 그룹 ‘포에틱 저스티스’가 한국사회 격변의 단면들을 시와 랩으로 포착해 퍼포먼스해온 캠페인 ‘일인시위’의 결과물이다. 현대시단과 힙합계의 최전선에서 대중과 평단의 찬사를 동시에 받아온 김경주 시인과 MC메타, 그리고 힙합 저널리스트 김봉현과 미국의 현대시인 제이크 레빈이 의기투합했다. 이들은 기존의 시 낭송 형태와 완전히 다른 무대와 워크숍을 통해 시와 랩의 연결점을 모색해왔다. 이 책과 함께 MC메타가 직접 녹음해 한정 발매하는 《포에틱 저스티스 믹스테이프》는 4년의 퍼포먼스 끝에 얻은 텍스트와 시각 자료를 엮어낸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두 현대시인이 벌이는 포에트리 슬램 배틀

그 미학적 전투에서 드러나는 한국사회의 민낯

 

감각을 확장하는 언어적 전위를 계속해오며 문학과 음악의 경계를 자주 허물었던 김경주는 이번에는 예술가 그룹을 통해 시가 발화하는 새로운 양식을 실험한다. 이 책의 시 혹은 포에트리 슬램으로 불러야 할 텍스트들이 형식적인 면에서 랩의 라임과 플로우를 고려했다면, 시의 내용은 2016부터 2018년까지 촛불 혁명을 기점으로 거대한 정치적, 사회적 전환을 맞이한 한국사회를 관통한다. 용광로에 빠져 허망하게 삶을 마감한 청년을 다룬 <용광로에 빠진 눈사람>부터 자식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 노인의 고독사를 다룬 <단독생활동물>까지, 청년의 죽음부터 노인의 죽음 사이에는 소수자, 미세먼지, 취업, 젠트리피케이션, 동물복지 문제 등 현대사회의 틈에서 발견한 웃기고 슬프고 뻔뻔한 사건들이 펼쳐져 있다.

구성을 들여다보면 하나의 주제를 놓고 한국과 미국의 두 현대시인이 포에트리 슬램 배틀을 벌이는 식인데, 열한 곳의 전선에서 벌어지는 미학적 전투에서는 예상치 못한 인식의 차이가 드러나기도 한다. 전선들이 한국사회에서 치명적이었던 것만큼 한 방향으로 굳어졌던 우리의 인식과는 다른 제이크 레빈의 관점과 표현은 흥미로운 지점들을 생성하고 있다. 가령 평창 롱패딩 열풍에서 착안한 <사라지는 엉덩이의 계절>에서 그는 롱패딩에 가려진 엉덩이에 집중한다. 레빈의 시어가 지니는 의미는 자주 그 대상을 훌쩍 뛰어넘는데, 유행에 맞춰 똑같은 패딩을 입는 행위는 저마다 무한하게 열려 있는 우리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과 같다며 이를 “엉덩이는 인간의 기회다.”라고 쓴다. 사라지는 엉덩이는 사라지는 자신이다.

 

시에서 랩으로의 전이

그것은 활자들이 연기처럼 소리가 되는 경험이다

 

포에트리 슬램은 시 낭독과 랩 공연의 중간 즈음에 위치한 퍼포먼스의 한 형태로, 높낮이가 뚜렷한 강한 어조와 적극적인 몸짓, 여러 도구를 동원해 어떤 텍스트든 그 전달력을 놀랍도록 끌어올린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인간 안에 숨은 시적 리듬을 복원하고자 한다. 이 책에 수록된 시 역시 기존의 눈으로 읽는 방식에 머물지 않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낄 때 화자의 의도를 더욱 정확히 느낄 수 있다. 실제로 이 책에 실린 시들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장웹진>에 연재될 때, MC메타가 이 시들을 랩으로 바꿔 부른 영상도 함께 발표되었다. 시를 랩으로 전환하는 작업에 대해 MC메타는 이렇게 말한다.

“혼란 속에서 질서를 찾듯, 질서 속에서 로우raw한 에너지를 보듯 나는 단어와 문장을 하나의 생명체로 인식하고 그들이 보여주는 소리를 들으려고 애썼다. 때로는 더듬어도 보고 때로는 헤집어도 보고 철없는 아이처럼 여기저기 어떤 소리가 나는지 들쑤셔보았다. 그러다 통로를 찾으면 그대로 밀고 나갔다.”(본문에서)

물론 모든 시와 랩에서 공통분모를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처럼 시인과 래퍼가 일상적인 공간에서 서로의 말들을 괜스레 들춰보고 자신의 운율이나 비트 위에 얹어보는 일이 반복될 때 또 다른 예술의 한 방식이 생겨나는 것일지 모른다. 형식과 권위에 매몰되지 않고 숨겨진 인간성과 그 리듬을 찾는 일에 헌신하는 예술가들의 서로를 넘나드는 실험, 그것이 바로 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