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의 유대인 제국
조너선 카우프만
최파일
2023-02-01
448
143*215 mm
979-11-90955-82-9 (93910)
22,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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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N <벌거벗은 세계사> 강연자 윤영휘 교수 강력 추천!
✦ <파이낸셜 타임스> <포브스> <월스트리트 저널> <이코노미스트> 등 해외 유력 매체 추천!
✦ “유대인 라이벌 가문이라는 렌즈를 통해 보는 생생한 역사”_에이미 추아(《정치적 부족주의》 저자)
✦ “세계를 무대로 한 대단히 매혹적인 이야기”_수산나 헤셀(다트머스 대학교 석좌교수)

“이것은 한때 또 다른 중국을 약속했던
상하이에 대한 하나의 기억, 하나의 꿈이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가 복원한 숨겨진 100년,
현대 중국의 탄생에 기여한 유대 기업 제국의 잊힌 역사

  《상하이의 유대인 제국》은 중국 근현대사의 중심에서 거대한 기업 제국을 형성했던 두 라이벌 가문 서순과 커두리의 숨겨진 100년을 복원한 논픽션이다. <월스트리트 저널> <블룸버그> <보스턴 글로브>의 중국 담당 기자로 30년 가까이 일하며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던 조너선 카우프만은 치밀한 자료 조사와 수많은 인터뷰, 소설가와 같은 글솜씨로 중국 근대화 과정에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서순과 커두리의 유산을 세상에 드러냈다. 《상하이의 유대인 제국》은 중국 정부가 감추려 했던 이면의 역사를 파고들었다는 점에서 출간 당시부터 유력 매체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수십 년 동안 중국 공산당 통치자들은 상하이를 지배했던 두 유대인 가문의 이야기를 덮어 왔다. 중국의 역사 서술은 1차 아편전쟁이 끝난 1842년부터 1949년 공산당 집권까지를 외국에 유린당한 ‘치욕의 100년’으로 기록한다. 그렇기에 유대 기업 서순과 커두리의 이야기는 마오쩌둥과 그의 헌신적인 공산주의자 군대가 탐욕스러운 자본가들을 타도했다는 프로파간다 서사로나 등장할 뿐, 특별히 언급되거나 다뤄지지 못했다. 중국인들에게 상하이는 “군사적 패배와 치욕”을 상기시켰다.
  하지만 저자는 ‘치욕의 100년’에 또 다른 진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어떤 중국인들에게 상하이는 “미래를 비춰 주었다”고 말이다. 상하이는 1842년 난징조약 체결 이전까지 거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도시였다. 하지만 불과 50여 년 만인 1895년에 런던 수준의 시내 전차 체계와 가스 공급망을 확보했고, 1930년대에는 시카고와 뉴욕에 버금가는 마천루와 스카이라인을 갖춘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로 성장했다.
  이 극적인 변화를 이끈 중심에 유대 기업 서순과 커두리가 있었다. 이들은 제국주의의 수혜를 입으며 상하이를 착취했지만, 경제 호황에 불을 붙이고 기업가 정신이 충만한 문화를 불어 넣었다. 중국이 경화된 봉건 사회를 탈피하고 현대적인 산업 사회로 진입하려 몸부림치고 있을 때 수많은 중국인이 과감한 사업의 꿈을 추구할 장소로 상하이를 선택했다. 두 유대인 가문은 현대 중국의 탄생에 기여하며 “수억 명의 삶을 변화시켰다.”

그들의 결정은 수억 명의 삶을 변화시켰다. 서순가는 나머지 세계가 불황에 빠져들고 있던 1930년대에 중국 경제를 안정화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그들은 중국인 한 세대를 세계 자본주의 안에서 육성하며 오늘날 중국의 놀라운 성공을 위한 길을 닦았다. 커두리가는 수백만 홍콩 주민에게 전기를 공급하며 수백 년 동안 삶의 속도가 바뀌지 않던 지역들을 변모시켰다. 1949년 이후, 공산주의를 피해 도망쳐 온 상하이 출신 중국인 공장주들과 손을 잡기로 한 커두리 가문의 결정은 세계 시장을 열어젖히고, 홍콩의 성장을 촉진하고, 21세기에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만든 수출 붐을 위한 무대를 마련했다. _39쪽, <들어가는 글>


“모두가 그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대조적인 위치에서 성공을 이뤄낸 두 명의 억만장자
후대를 거쳐 마침내 역사의 일부가 되다

  조너선 카우프만은 한 인터뷰에서 "내가 작업에 몰두할수록, 그것은 실제로 두 가지 이야기가 된 것 같다. 하나는 두 유대인 가문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이 처음 세계와 연결되는 방식이었던 근대화와 세계화에 관한 것“이라 말하며 두 가문의 이야기가 중국 근현대사뿐만 아니라 세계화의 거대한 맥락과 연결되었음을 밝힌다. 저자의 치밀한 추적은 서순과 커두리의 발자취와 함께 격동하는 20세기 초의 역사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상하이를 지배했던 두 유대인 가문의 뿌리는 중동의 바그다드였다. 데이비드 서순은 오스만 제국의 치하에서 경제 자문을 하는 유대인 지배계층으로 태어났지만, 통치자들의 권력 다툼에 밀려 고향에서 도망친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시아의 로스차일드’라고 불리는 서순 가문의 명망이 있었고, 홀로 중동과 인도를 오가며 자신의 무역 사업을 확장한다. 그는 “성공적으로 복귀한 명문가의 후예”였다.
  반면 엘리 커두리는 바닥에서 시작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열다섯에 데이비드 서순이 설립한 직업 학교에 입학한 그는 전통과 권위, 인맥 하나 없이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졸업 후 서순 기업에서 일했지만, 감염병을 막기 위해 회사의 소독약을 중국인 직원들에게 허락 없이 나눠준 사건을 계기로 독립하게 된다.
  대조적인 두 가부장은 아편전쟁 이후 국제 조계(the International Concession)로 기업 공화국처럼 운영되던 상하이에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았고, 후대에 걸쳐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아편 무역을 통해 번 돈으로 부동산과 기반 사업에 투자했으며, 국민당을 지지해 장제스의 환심을 샀다. 서순가와 커두리가는 일본의 점령기도 잘 버텼지만, 공산당 집권 이후 내린 서로 다른 정치적 결정으로 인해 엇갈린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두 가문의 선택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미·중 갈등을 비롯한 각종 규제와 간섭을 견디지 못하고 서구 기업이 중국을 떠나는, 이른바 ‘차이나 엑소더스(China Exodus)’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100년 전 그들이 겪어냈던 성장과 발전, 투쟁과 모순은 오늘날 국제 정세의 격랑에서 숨겨진 맥락을 읽어내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이 직면한 문제들―외국인들과 함께 일하기, 불평등과 부패, 세계 속에서 중국의 위상 찾기, 민족주의와 개방성 사이의 균형, 민주주의와 정치적 통제, 다양성과 변화―은 상하이를 만들어왔고, 커두리와 서순이 매일같이 직면했던 문제들이다. 두 가문만큼 상하이도, 그곳의 성장과 발전, 투쟁과 모순도 이 책의 주인공이다. _41쪽, <들어가는 글>


20세기 초 상하이에서 마주하는 역사의 아이러니:
식민지 치욕 속에 일궈진 자본주의 정신과 사회주의 혁명,
글로벌 기업의 정치적·도덕적 딜레마

  20세기 초 상하이는 거대한 기업 가문이 가져온 자본주의적 관점을 가감 없이 수용했다. 수많은 중국인이 와이탄에 늘어선 외국 기업에서 일할 꿈을 안고 상하이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들은 자기 나라에서 이민자처럼 살았다. 빈민가에 밀집해 살면서도 부지런히 일했고 혁신적인 기업가 정신을 배워나갔다. 중국인들은 면화, 고무, 담배, 제철, 제분, 식품 가공 회사들을 설립했다. 19세기 말부터 1920년대 사이 중국에 신설된 공장의 절반 이상이 상하이에 만들어졌다.

1920년대에 상하이를 처음 방문했을 때, 훗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중국에 대한 미국의 시각과 대중 관계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될 미국의 군인 조지프 스틸웰은 도시의 현대성에 깜짝 놀랐다. 목조 불탑과 완만하게 경사진 지붕을 얹은 절로 이루어진 동양풍 스카이라인 대신 스틸웰의 눈에 비친 것은 현대적인 호텔과 은행, 대로와 서양식 공원이었다. (...)그는 중국인들의 에너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올바른 지도만 받는다면 작업 능력과 제조 능력을 갖춘 4억 인구는 세계를 주름잡을 것이며 우리는 그들과 한편인 게 좋을 것”이라고 일기에 썼다. _141쪽, 4장 <떠오르는 상하이>

  하지만 화려한 스카이라인과 마천루 뒤편에서, 계속되는 불평등과 빈곤으로 인한 중국인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상하이 국제 조계의 코즈모폴리턴적 분위기와 자유로운 언론은 국민당 정부의 탄압으로 위축된 공산당이 혁명을 조직하는 거점이 됐다. 마오쩌둥은 상하이에 거주하며 1921년 공산당의 첫 전당대회를 열었고, 저우언라이는 1927년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1949년 마침내 집권에 성공한 공산당은 이후 상하이를 철저히 통제하고 자본가들을 구금했다.
  제국주의 물결에 따라 중국의 자본주의를 성장시켰던 서순과 커두리는 결국 빈부격차를 심화하고 방치하며 사회주의 혁명의 불씨를 제공했다. 아편 무역으로 수많은 중국인의 삶을 망가트렸고, 영국을 옹호하는 제국주의의 수혜자였으며, 홍콩의 민주주의 도입에 반대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치를 피해 상하이로 입항한 유대인 난민을 보호하고자 처음으로 힘을 합치기도 했다. 그들의 노력으로 1만 8,000명의 유대인 난민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저자는 서순과 커두리가 뒤바뀌는 물결을 따라 이뤄낸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결코 객관적인 판단을 잃지 않는다. 그들은 정치적 자유와 도리보다는 상업적 이익을 택했고, 뛰어난 사업가였지만 언제나 정치적·도덕적 딜레마에 빠져들었다. 이는 구글부터 페이스북, 애플 등 21세기 글로벌 기업도 매 순간 직면하는 딜레마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상하이의 과거는 중국의 미래에 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상하이와 베이징, 21세기 중국이 놓인 갈림길

  현대 중국은 공산당 지도자들과 국민이 줄곧 염원해온 세계적인 강대국이 되었다. 중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며, 군사적으로도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중국이 세계와 소통하는 방식은 여전히 잦은 마찰음을 낸다. ‘신냉전’이라는 불리는 미국과의 군사적 긴장 관계, 이를 견제하는 동시에 유럽과 아프리카로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일장일로(一帶一路)’ 사업, 타 국가에 대한 주권 침해로 논란이 된 ‘국외 불법 경찰조직 운영’ 등 최근까지도 외교적 이슈가 끊이지 않는다. 저자는 두 유대인 가문이 남긴 유산을 복원하면서 중국의 오랜 논쟁도 함께 조명한다. 바로 상하이와 베이징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앞날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경로를 둘러싼 논쟁”이다.
  상하이는 오늘날에도 혁신을 끌어안는다. 반면 베이징은 더 내부 지향적이고 민족주의적이며, 과거에는 황제의, 지금은 공산당 지도부의 본거지다. 두 도시가 밟아온 상반된 역사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정서도 바꾸어 놓았다. 상하이의 중국인들은 베이징의 동포들이 조야하고 편협하며, 외부 세계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고 조롱한다. 반면 베이징에 사는 중국인들은 상하이 사람들이 오로지 돈과 패션에만 관심이 있고 외국 문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이라고 멸시한다.
  저자는 “중국의 힘과 영향력이 점차 커지면서 그러한 차이점들은 중요해졌다”고 말한다. 그 차이점들이 “중국이 세상을 향해 취하는 태도를 형성할 것”이기 때문이다(402쪽). 대립하는 정체성을 끌어안고 21세기의 갈림길에 선 중국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리고 세계는 중국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 끈질기고 위태로운 질문의 답은 어쩌면 역사에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던, 현대 중국을 만든 모순과 아이러니가 고요히 잠들어 있는 《상하이의 유대인 제국》에 말이다.

《상하이의 유대인 제국》은 현재적 효용성을 갖추었다. 주지하듯이 중국 역사 서술은 1842년 제1차 아편전쟁부터 1949년 중국 공산당 집권까지의 기간을 외세에 시달린 ‘치욕의 100년’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런 역사 해석에 대안적인 서술의 가능성을 제기한다. 실제로 상하이는 이 시기 동안 세계적 수준의 교통망과 가스 공급망을 구축했다. 해안을 따라 시카고나 뉴욕 못지않은 스카이라인을 갖추었으며, 1930년대 대공황 시대에도 호황을 누렸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놀랍게도 중동의 바그다드에서 발원해 상하이에 정착한 유대인 가문들이 있었다. 중일전쟁, 국공내전, 공산당의 집권이라는 중국 역사의 변곡점에서 서양 자본가를 대표하는 서순 가문과 커두리 가문이 내린 선택들은, 오늘날에도 중국인들이 당면한 문제들을 다루는 방식과 세계가 중국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엿볼 기회를 준다.
_윤영휘(경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tvN <벌거벗은 세계사> 강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