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책 제목을 바꿨다.
이제 그 책은 《1984》가 될 것이다.
아일린이 썼던 시처럼.”
조지 오웰의 《1984》보다 먼저 〈세기말, 1984〉라는 디스토피아 시를 쓴 여자가 있었다. 시에서는 ‘텔레파시’로 ‘세뇌’되는 미래가 언급된다. 《동물농장》을 우화로 기획하고 함께 편집한 사람도 그녀였다. 여자는 옥스퍼드에서 장학금을 받고 영문학을 전공한 심리학자였으며, 스페인 내전에 참여했고, 전선에서 부상당한 오웰을 보살피고, 체포되어 처형될 위기에 처한 마지막 순간에는 압수 수색에서 지켜낸 여권과 서류로 탈출 계획을 준비해 오웰과 동료들을 구출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정보부 검열과에 근무하며 뉴스를 검열하고 삭제하는 일을 하기도 했던 여자의 별명은, “돼지”였다.
“…돼지들은 ‘파일’, ‘보고서’, ‘의사록’, ‘각서’라고 불리는 수수께끼 같은 것들을 만들어내는 데 매일 엄청난 노동력을 쏟아야 했다. 그것들은 커다란 종이였는데, 글로 빽빽하게 채워져야 했고, 그렇게 채워지자마자 불태워졌다.” _498~499쪽, 《동물농장》에서
영국 최고의 논픽션상 새뮤얼 존슨상(현 베일리 기포드상)을 수상한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애나 펀더는 2017년 어느 날 조지 오웰이 생의 마지막 시기에 남긴 기묘한 글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글이, 첫 번째 아내 ‘아일린 모드 오쇼네시 블레어(Eileen Maud O’Shaughnessy Blair)’를 겨냥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때마침 2005년, 아일린이 절친한 친구 노라 사임스 마일즈에게 남긴 여섯 통의 편지가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저자는 어떤 기록에서도 드러나지 않는 아일린의 정체를 파헤치리라 마음먹고, 아일린의 흔적을 뒤쫓는다. 부부의 주변인들이 남긴 기록을 발굴하고, 부부의 양아들 리처드 블레어와 스페인을 방문하는 대대적인 조사를 통해 한 인간의 가장 가까이에서, 부부의 식탁에서, 책상에서, 침대에서 ‘조지 오웰’이라는 세계와 그의 글을 창조했으나 그저 서른일곱 번의 ‘내 아내’라는 언급으로만 세상에 남은 여자의 이름을 다시 복원한다.
주목받지 않은 역사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오웰’
저자 애나 펀더는 호주 정부에서 재직한 전직 인권 변호사로, 동독을 배경으로 한 첫 번째 책 《슈타지랜드Stasiland》로 바이에른 문학상, 새뮤얼 존슨상 등을 수상하며 논픽션 작가로서 진가를 인정받았다. 그에 앞서 한국 독자들을 찾아온 이번 책 《조지 오웰 뒤에서》는 기록되지 않은 목소리를 복원하고 권력, 기억, 진실의 관계를 탐구하는 저자 특유의 집요한 탐사 작업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이 여정의 시작에는 저자 본인이 존경해 마지않는 작가 조지 오웰이 첫 번째 아내를 겨냥해 쓴 텍스트가 있었다.
“여자들에 관해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하나는 그들이 구제할 길이 없을 만큼 지저분하고 단정치 못하다는 점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들의 무섭도록 탐욕스러운 성욕이었다.” _33~34쪽, 오웰의 투병 시기 노트에서
조지 오웰은 아내 아일린을 언급한 적이 거의 없고, 전기 작가들의 ‘공식화된’ 기록 속의 아일린은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118쪽). 반면 애나 펀더가 발굴해 낸 아일린은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사람이다.
“늦지 않게 편지 쓰던 습관을 결혼하고 첫 몇 주 동안 잃어버렸나 봐. 에릭이랑 너무도 끊임없이, 정말이지 격렬하게 싸워댔거든. 살인이나 별거가 성사되면 편지를 딱 한 통만 써서 모두에게 보내는 편이 시간 절약이 되겠다는 생각까지 들지 뭐야.” _23쪽, 아일린의 1936년 편지에서
오웰이 스페인 내전에서 써낸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아일린은 “차와 초콜릿”을 보내주는 존재이다(168쪽). 오웰의 전기 작가들 역시 아일린이 스페인에 간 건 “자원봉사자로 일하기 위해서”이며, “그저 오웰 가까이에 있고 싶어서”였다고 주장한다. 진실은 달랐다. 아일린은 ILP(영국 독립노동당) 스페인 지부에서 병참 업무와 선전 활동을 담당했고, 오웰과 동료들의 목숨을 구했다. 그런 아일린의 활약을 가장 생생히 기록한 것은 남편 오웰이 아닌, 선전부에서 함께 일한 찰스 오어라는 미국인 동료였다. 그의 기록 속에서, 아일린은 결코 보조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단연 돋보이는” 사람이며, 오웰을 이끄는 존재였다.
“모두가 아일린을 좋아했다. 남자들뿐 아니라 여자들도. … 오웰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작가 지망생에 불과했고 … 아일린은 이 말주변 없는 남자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게 도와주었다. … 그렇게 훌륭한 여자를 아내로 얻을 수 있었던 남자라면 어딘가 괜찮은 구석이 있을 게 틀림없었다. 결혼한 지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아일린은 오웰의 대변인이 되어 있었다.” _177~179쪽, 찰스 오어의 기록에서
여러 증언과 기록 속의 아일린은 작가 지망생 ‘에릭 블레어’가 대작가 ‘조지 오웰’이 될 수 있도록 그를 경제적으로 부양하고, 심리적으로 지지하고, 지적으로 교류하며, 창작을 뒷받침하는 존재였다. 저자는 조지 오웰의 팬이었던 자신이 아일린의 헌신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에, 아일린이 의도적으로 지워진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는 사실에 끊임없이 놀란다. 왜 우리는 아일린을 알지 못했을까? 아일린의 이름을 지운 것은 누구일까?
아일린은 대작가 ‘조지 오웰’을
어떻게 창조했나
아일린과 오웰은 1935년 봄 작은 파티에서 처음 만났다. 아일린은 옥스퍼드에서 장학금을 받고 문학을 전공했으며, UCL의 심리학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었다. 서점에서 일하는 가난한 작가 지망생 에릭 블레어는 얹혀 살던 집의 주인에게 파티를 제안해 아일린을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곧 결혼을 약속한다. 아일린을 파티에 데려간 장본인이자, 부부의 가까운 친구가 되는 러시아인 심리학자 리디아 잭슨은 이렇게 회상한다.
“뭐! 벌써?” 나는 소리 질렀다. …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인데?” “모르겠네… 있지, 난 서른 살이 되면 처음으로 청혼하는 남자를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했거든. 근데… 내년이면 내가 서른이야….” _55~56쪽, 리디아 잭슨의 기록에서
1936년 결혼 후, 부부는 오웰의 바람대로 시골로 떠난다. 이를 위해 학위를 포기한 아일린은 오웰이 창작에 집중할 수 있도록 생계와 가사까지 담당한다. 폐병을 앓는 오웰을 돌보고, 스페인 내전에 함께 참여하고, 남편과 남편의 원고들을 구출한다. 무엇보다 오웰의 원고를 교열하고, 편집하기 시작한다.
“난 그 사람 원고를 타자로 쳐주는데, 원고 뒷면에 내가 손으로 잔뜩 적어놓은 수정 사항을 읽을 수가 없어서 그 사람은 항상 내게 다시 물어봐야 해.” _269쪽, 아일린이 노라에게 쓴 1938년의 편지
“부탁이야. 편지를 써줘. … 주말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없게 된 지도 말 그대로 수년째야. 조지가 피를 토할 거야.” _385쪽, 아일린이 노라에게 쓴 1940년의 편지
아일린은 작품의 기획 단계부터 참여하기 시작한다. 1944년, 스탈린을 비판하는 에세이를 쓰려고 마음먹은 오웰에게 아일린은 “그 이야기를 장편소설로, (아일린) 자신이 매우 좋아하고 한때는 직접 써보고 싶어 하기도 했던 동물이 나오는 우화로 써보라고 제안”한다. “매일 저녁 오웰은 아일린에게 그날 쓴 부분을 읽어주고 의견을 주고받”았고, 두 사람은 “얼어붙을 것 같은 1층 침실”에 누워 “한 장면 한 장면을 이야기”한다. 아일린은 “매일 아침 출근해 새로 추가된 부분의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주었다(416~420쪽). 이 책은 바로, 세기의 고전《동물농장》이다.
아일린은 자신의 삶을 바쳐 조지 오웰을 창조했다. 그러나 1945년 자궁적출술을 받던 중 서른아홉 이른 나이에 사망한다. “아내가 가족을 잃은 슬픔을 겪고 있는 와중에” “나 자신에게 생일 선물을 줘도 된다고 아일린도 말했다”며 다른 여인에게 밀회를 구하는 편지를 쓰던 오웰은(364~365쪽) 입양한 갓난아기와 아픈 아내를 내버려 두고 떠났다(435~439쪽). 심각한 빈혈 때문에 최소 한 달의 입원과 수혈이 필요했던 아일린은 오웰의 답장을 기다리던 끝에 저렴한 당일 수술을 받으러 홀로 찾아간 시골의 병원에서 사망한다. 죽음을 예감하고 유언장까지 남겼으나, 마지막 순간까지 오웰을 지지했다(440~473쪽).
“난 당신이 다시 책을 쓰는 게 정말로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 난 당신이 문학적인 삶만 사는 걸 그만두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는 걸 보고 싶어요.” _453~454쪽, 아일린이 오웰에게 쓴 1945년의 편지(사망 8일 전)
다시 읽는 오웰, 다시 쓰는 서사,
지워진 목소리를 복원하고 새로 쓰는 역사
“이 책은 남성 작가 조지 오웰과 후대 여성 작가 애나 펀더의 싸움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웰의 여러 전기 작가들과 아일린의 전기 작가 애나 펀더의 싸움, 공식화된 평가와 재평가의 싸움, 남성 예술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앙과 그 추앙 속에 사라진 한 여성을 되살리려는 시도의 싸움에 가깝다.”_583쪽, ‘옮긴이의 말’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돌보아주던 존재를 잃은 오웰 역시 5년이 채 지나지 않아 사망한다. 그는 사별 직후 몇 달간 최소 4명의 여성을 “덮치고 청혼”했는데(502쪽), 그중 한 명인 앤 올리비아 팝햄에게 쓴 편지에서는 “문학인의 미망인이 되고 싶은지” 물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난 내 여생과 내 작업을 함께해 줄 누군가를 정말로 원해요… 내가 앞으로 10년을 더 살 수 있다면, 가치 있는 책 세 권쯤은 더 쓸 거라고 생각해요.”_513쪽~516쪽, 오웰이 앤에게 쓴 편지에서
오웰은 아일린이 자신을 위해 해준 일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일린이 없었다면, 조지 오웰은 존재할 수 있었을까? 그의 작품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가 조지 오웰도, 그의 작품들도 아일린의 삶에 기대어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일린의 헌신과 노고는 지워졌다. “능동태를 쓸 수 있는 곳에 절대 수동태를 쓰지 마라”(98쪽) 당부했던 오웰 자신이 아일린의 공로를 수동태로 덜어내고, ‘아내’라는 언급으로 이름을 대신했다. 전기 작가들은 시간 순서를 조작하고 아예 진실을 날조해 아일린의 존재 자체를 지우기에 이른다. 그렇게 ‘20세기의 위대한 작가’를 창조한다. 우리가 믿어온 ‘진실’은 누구에 의해,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지는가?
이 책은 단순한 전기가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오웰을 “취소”하려는 책도 아니다(49쪽). 이 책은 위대한 신화의 그림자 뒤에 숨겨져 의도적으로 누락되고 축소되고 ‘거짓 동의’로 와해되어 흩어진, 지워진 한 인간의 이름을 되살림으로써 착취와 침묵이 어떻게 요구되는가를 우리에게 묻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구조를 직시하게 한다. 조지 오웰은 “자서전은 오직 수치스러운 무언가를 드러낼 때만 신뢰할 만하다”고 밝힌 바 있다(85쪽). 사망 3개월 전 결혼한 두 번째 아내 소니아에게는 “자신에 대한 어떤 전기도 쓰이지 않도록 금지”했다(554쪽). 그 자신도 거부한 ‘완전무결한 천재 남성 작가’라는 허구적 신화를 덧씌운 반쪽짜리 오웰을 우리가 제대로 읽어왔다 할 수 있을까?
기존 서사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독해의 지평을 여는 이 책은 오웰의 상징적 작품들을 새롭게 읽게 만드는 전환점을 제공한다. 역사에서 지워진 누군가의 이야기가 다시 역사를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은 시대를 불문하고 문학이 우리에게 던져온 메시지였다. 70년 동안 묻혀 있던 한 여자의 삶을 되살리는 이 책은, 문학사의 숨은 공신들을 마주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길을 독자들에게 열어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