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유전자: 나를 찾아낸 과학혁명
대니얼 데이비스
양병찬
2016-03-21
320
153*225 mm
979-11-85585-21-5 (03470)
16,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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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유전자 - ‘자기self’를 알아야 ‘비자기non-self’에 맞서 싸울 수 있다

우리의 몸은 어떻게 질병에 맞서 싸울 수 있나? 외부로부터 세균이 침투했을 때 내 몸이 이에 맞서 싸우려면 무엇보다 나의 세포(자기self)인지, 아니면 외부로부터의 이물질(비자기non-self)인지를 알아내야 한다. 이 질문에 답을 제시하는 과학이 바로 면역학immunology이다. 이 책의 저자이자 일류 면역학자인 대니얼 데이비스는, 나만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를 식별할 수 있게 해주는 유전자(적합유전자 또는 MHC 유전자)를 전면에 내세워 ‘자기와 비자기의 투쟁’으로 면역을 설명한다.

 

메더워, 면역학의 과학혁명을 시작하다

면역학의 역사는 멀리 파스퇴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면역에 대한 개념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질병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했다. 오늘날에는 일반인들도 세균의 개념을 알고 있지만, 그렇지 못했던 과거에는 미아스마라고 불리는 독성 증기나 악령의 분노 또는 네 가지 체액의 불균형 등으로 인해 질병이 생겨난다고 여겨졌다. 이런 상황에서 파스퇴르는 유명한 S자 형태의 플라스크 실험을 통해 ‘매우 작은 생명체가 우리 주변에 늘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어 1876년 로버트 코흐(1905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는 ‘미생물이 사람에게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면역학이 본격적인 과학혁명의 궤도에 접어든 것은 1940년대 이후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화상 환자를 치료하던 피터 메더워(1960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는 피부이식을 하는 과정에서 장벽에 부딪혔다. 환자 자신의 피부를 환부에 이식할 때는 문제가 없는데, 다른 사람의 피부를 이식할 때는 이식거부 현상이 발생했던 것이다. 수많은 실험을 거쳐 메더워는 환자의 몸이 자신의 조직은 자기self로 인식하여 받아들이는 반면, 외부 조직을 비자기non-self로 인식하여 거부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사상가 버넷과 클론선택이론

메더워와 같은 해에 노벨상을 수상한 호주의 프랭크 버넷(버넷은 면역관용 가설을 제기했고, 메더워는 이를 증명하여 노벨상을 공동 수상)은 인체가 자기와 비자기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버넷은 ‘항체’에 집중했는데, 다만 항체가 수많은 종류의 세균을 인식하면서도 자기의 세포나 조직을 공격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해야 했다. 버넷은 닐스 예르네(1984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가 제시한 가설을 약간 수정하여 그 유명한 클론선택이론을 제시했다.

하나의 세포는 하나의 특정한 항체를 만드는데, 면역세포들이 만드는 항체의 레퍼토리를 모두 합하면 자그마치 10억 개에 달하며, 각 항체는 조금씩 다른 모양을 지녔다. 특정한 세균(비자기, 항원)이 인체에 침입할 경우, 이에 알맞은 항체를 만들 수 있는 면역세포가 여러 개의 클론으로 분열함으로써 특정 항체를 대량으로 생성하여 위험한 분자 또는 미생물을 효과적으로 중화시킨다.

클론선택이론은 다윈의 자연선택이론을 세포에 적용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버넷은 인체를 자연생태계와 같은 동적 장소로 보고, 그 속에서 수많은 세포들이 상호작용하고 증식하고 사멸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특정 세균에 맞서는 면역세포가 경쟁에서 승리하여 면역계의 지배적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했다.

 

적합유전자는 왜 나만의 유전자가 되었나?

1960년을 전후하여 장 도세(1980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는 여러 번 수혈받은 적 있는 사람들의 혈청이 몇몇 다른 사람들의 백혈구에 거부반응을 나타내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수혈받은 사람의 면역계가 한번 경험했던 것과 동일한 비자기 세포를 만나 반응하기 때문이었다. 같은 시기에 미국의 로즈 페인과 네덜란드의 욘 판 로트는 자녀를 여럿 둔 엄마들이 수혈을 받다가 쓰러지는 사례에 주목했다. 이것은 여러 번의 출산 과정에서 아기 아빠로부터 유래한 비자기 단백질을 경험한 바 있기 때문이었다. 이 세 연구자들이 독립적으로 발견한 연구 결과는 인간에게 다양성을 부여하는 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적합유전자였다. 그리고 이 적합유전자의 형질은 피부, 머카락, 눈색깔 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다.

그렇다면 적합유전자는 왜 그렇게 다양한 것일까? 단지 이식을 까다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그 진정한 역할은 무엇일까? 1973년 피터 도허티와 롤프 징커나겔(1996년 노벨 생리의학상 공동 수상)은 적합유전자가 이식의 적합성만이 아니라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면역 반응까지도 조절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들은 자신들의 발견이 시사하는 점을 설명하면서 ‘면역계가 변형된 자기를 인식함으로써 작용한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즉, 인체의 적합유전자 단백질이 바이러스에 의해 변형되면, 면역계가 이를 ‘변형된 자기’로 감지하여 질병의 징후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도허티와 징커나겔은 ‘만약 바이러스를 감지하는 과정이 사람마다 다르다면, 바이러스가 인체에 침입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천재적인 가설을 제시했다. 달리 말해, 인간이 적합유전자의 다양성을 진화시킴으로써 많은 사람이 동시에 바이러스로부터 피해를 볼 가능성을 차단했다는 것이었다. 이후 하버드의 비요르크만, 와일리, 스트로민저 세 명이 적합유전자 단백질의 구조를 밝혀냈는데, 이는 마치 유전학에서 왓슨과 크릭이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것에 비견되는 발견으로 간주된다.

 

사랑, 마음, 임신에도 영향을 미치는 적합유전자

적합유전자는 우리가 매력을 느끼는 상대에도 영향을 미친다. 급진적인 연구들은 DNA 분석을 통해 자녀에게 양질의 유전자를 물려주고 오르가즘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이상적 배우자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직 미지의 영역인 뇌에서도 면역계 단백질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특히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 슬픈 느낌이 드는 것은 면역계와 신경계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추정도 제기되고 있다. 임신의 성공 여부에도 적합유전자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적합유전자는 이처럼 다양한 측면에서 우리의 생로병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적합유전자의 이러한 다기능성은 삶의 다양한 측면들이 궁극적으로 모두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이 질병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화시킨 면역계가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가 된다.

 

21세기 의학이 갈 길

적합유전자의 특징과 역할을 깊이 이해하고 그에 관한 논쟁을 해결하는 것이 단지 학문적 관심사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예를 들어, 어떤 질병에 대한 반응이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다면, 특정한 약물에 대한 반응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멀지 않은 미래에 적합유전자에 따라 맞춤형으로 처방되는 백신 또는 치료제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적합유전자의 비밀을 규명하는 것이 21세기 의학의 중요한 문제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