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유럽, 기원과 시작
김미지
2019-06-30
260
148*220 mm
979-11-85585-68-0 (03910)
16,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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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이 ‘유럽’을 떠올렸을 때 드는 생각은 무엇일까?
과학기술의 나라 독일, 신사의 나라 영국, 문화와 예술의 나라 프랑스라는 이미지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테러와 인종차별 사건이 발생하기는 하나 유럽 국가들은 우리의 이웃나라도 아니고, 그중 미국처럼 우리의 현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나라도 없다. 우리가 이들과 교류한 것도 15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유럽은 여전히 높은 인권의식과 복지 수준을 자랑하며 타민족, 타종교에 가장 개방적인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다. 유럽 국가들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이 책은 그 기원을 찾기 위해 150년 전, 조선과 유럽이 처음으로 교류한 19세기 말로 돌아간다. 당시의 조선인들은 서학을 배척하던 시대를 지나 신문, 실록, 문학 작품을 통해 그들의 국민성, 풍습, 지리를 알고자 했고, 그들을 배워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2014년 영국의 BBC에서는 24개국의 2만 4천 5백여 명을 대상으로 주요 13개국에 대한 국가 이미지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가장 호감도가 높은 국가는 독일, 캐나다, 영국, 프랑스, 일본 순이었다. 특히 한국인의 84퍼센트가 독일을 가장 긍정적인 나라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한국인들의 독일에 대한 호감, 신뢰, 선망은 매우 크게 나타났다.

독일뿐 아니라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근대 문화의 발상지로 세계 어느 곳보다 문화유산을 풍부하게 보존하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미국과 더불어 서구의 선진 국가로 그려진다. 그중에서도 독일과 프랑스, 영국은 근대부터 지금까지 유럽을 대표하는 나라들로 꼽힌다. 제국주의 시대부터 현대까지, 이 나라들은 때로는 전 세계에 식민지들을 만들어 힘을 축적했고,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인명을 학살하거나 이를 막아내기 위한 전쟁에 참가했다. 그런 영욕의 역사를 거쳤지만 이들에 대한 인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모아진다. 독일은 근면한 과학의 나라, 프랑스는 혁명과 유행의 불꽃, 영국은 산업혁명과 의회혁명을 일으킨 근대 문명의 선구자로.

이러한 일반적인 인식은 최근에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 여성 최초로 세계를 일주한 화가 나혜석은 “독일에서는 모든 것에서 과학의 냄새가 난다”는 감상을 남겼고, 독일제 물감을 선물 받은 박완서는 “문명의 냄새, 문화의 예감”이라고 황홀함을 표현했다.

 

유럽을 마주한 첫 장면
우리가 유럽이란 지역을 최초로 인지한 시기는 벨테브레(박연)와 하멜이 제주도에 표류해온 17세기일 것이다. 이런 우발적인 사건을 지나 18세기 중반부터 존재가 의심스러운 서양 배들이 한반도 연안에 출몰하며 의도하지 않은 만남이 시작됐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 유럽은 우호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없는 대상이었다. 여전히 중국이 세계의 중심으로 굳건하던 때였고 ‘요상하게 생긴’ 유럽인들은 한낱 오랑캐에 불과했다. 위협조차 될 수 없다고 여기며 철저히 배척하고 무시했다.

그러나 청나라를 통한 서양 문물의 유입은 막을 수 없었다. 역법이나 지도를 비롯한 과학기술은 정확하기 이를 데 없었고, 천주학은 금지하고 박해해도 기층 민중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추사 김정희는 서구 열강에 대해 “겁낼 것 없다”고 의연함을 표했지만 수백 년간 굳건하던 중국 중심의 세계관은 흔들리고 있었다. 곧 청나라는 영국군에 수도가 점령당하고, 불평등한 강화조약을 맺는 굴욕까지 겪고 만다. 대세는 이동하고 있었다.

 

만국을 향한 최초의 창, 《한성순보》
중국을 통한 정보의 수집과 유통은 더 이상 속도와 정확성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 또한 뒤늦은 개항(1876) 후 미국(1882)을 시작으로 서양 국가들과 통상조약을 맺게 되면서 새로운 나라들과의 교섭과 소통이 불가피해졌다. 1883년 일본에 다녀온 수신사 박영효의 제안으로, 정부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을 창간했다. 《한성순보》는 창간 취지에 맞게 외신을 번역해 보도하는 데 주력했고, 자체적인 관점을 견지하기보다는 청이나 영국 신문의 시각을 답습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예로 당시 영국과는 식민지 경쟁을 하고 인도차이나에서는 중국과 전쟁을 치르던 프랑스는 《한성순보》의 외신 보도를 통해 “교활하고 잔인한” 민족이나 유럽의 천덕꾸러기”로 묘사됐다.

《한성순보》는 비록 오늘날의 신문처럼 독자적인 취재 시스템을 갖추지는 못했으나 단순 보도를 넘어 논평과 같은 서술도 일부 보여주었다. 논설 지면을 통해 프랑스에 예속된 캄보디아를 안타까워했고, “어쩌다 중국이 이 지경이 됐는가” 같은 표현을 통해 한탄을 드러내기도 했다. 편향되거나 사실 여부가 불확실한 기사에는 “스스로 살필지어다” 같은 문구를 통해 유의하여 읽을 것을 알렸으며, 마지막 면에는 정정 요청이나 추가 보도 요청을 수렴할 정도로 독자의 해석과 판단을 존중했다. 조정이 발간한 관보이자 최초의 신문으로서 한계가 뚜렷했지만, 왕조정치를 넘어선 개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하는 진보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문명국 국민의 성품을 배우자
개항 이전의 조선은 서구 열강에 대한 정보를 주로 한문으로 번역된 지리지를 통해서 습득했다. 관련 정보가 전무하던 당시에는 위치나 면적 같은 기본적인 내용이 먼저 충족돼야 했다. 이후에는 각국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그들을 이해하고자 했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역사적 지식이 어느 정도 축적된 조선에서도 세계를 무대로 ‘당당히 도전하고 모험하는’ 청년들을 양성하려고 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뤄낸 미국이나 통일로 새로 발돋움한 이탈리아의 건아들은 ‘우리 청년들’이 배우고 거듭나야 할 롤 모델이었다.

한편으로는 ‘선진 문명국’들의 핵심은 국민성에 있다는 인식이 발달하여, 기존의 인식에 기초해 영, 미, 프, 독의 국민성을 규정하고 우리만의 특질을 개발하자는 논리가 대두됐다. 이러한 분석은 사회문화적으로 개별성이나 다양성을 기본으로 삼는 오늘날과는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일차원적이고 성급한 일반화였다. 하지만 국민 개개인의 능력에 국가의 운명이 달렸다는 환원주의적인 접근으로서 당시 동아시아에 팽배한 사상이었다. 조선에서는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을 들고 나왔고, 동시대 중국을 대표하는 사상가인 량치차오의 『신민설』이나 루쉰의 『아Q정전』 또한 중국 인민의 국민성 개혁에 골몰한 결과이다.

 

대문호와 백년제
1920년대를 지나면서 조선에서는 정보 습득을 넘어, 직접 교류할 수 없었던 서양인들의 세계나 삶과 더 적극적으로 소통하고자 했다. 그 일환으로 문화예술 중에서도 문학을 수용했다. 이것은 서구 문명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생겨나면서 가능해졌는데, 유럽 문명의 저력은 자본주의, 제국주의의 기반인 물질문명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이는 일제강점기였음에도 새로운 사상과 문화의 시대를 여는 전기가 되었다.

이런 움직임은 조선문학에도 세계에 내놓을 ‘대저술’을 만들어내자는 취지에 따른 것이었다. 예를 들면 영국을 진정한 문명국으로 만든 ‘특별한 것’은 인도 대륙이나 식민지 영토가 아니고 셰익스피어라는 대문호라는 것이었다. 이 시기의 문예운동은 국내에서 해외문학을 전공한 일본 유학생들이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불이 붙었다. 유학파 지식인들은 신문 기고를 통해 서양문학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도, 단지 독특한 취향 추구로서의 문화 수용을 비판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외국문학을 소개하고 보급하려 했다.

문인들은 매체를 통해 서양문학을 소개하고 비평하면서 조직적으로 기념행사를 열었다. 톨스토이와 괴테의 100주기에는 각각 두 문호의 삶과 작품을 되돌아보았다. 작품 해설을 중심으로 기념 좌담이나 방송이 열렸고 러시아 영사의 기념사를 번역, 소개하기도 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일간신문의 시대가 열린 신문 시장에서는 특집면을 할애해 위의 모든 내용을 풍부하게 담았다. 이외에도 현대판 ‘오늘의 역사’와 같이 대문호나 외국 위인들의 탄생일, 기일을 기념하였다. 브라질 건국, 구텐베르크의 활판술 발명과 같은 역사를 포함해 날마다 이런 사건이 있다는 것은 일간신문으로서는 안성맞춤의 기삿거리였다.

 

개화된 나라로서 세계를 누비는 꿈
일제가 집요하게 조선말과 글을 없애려던 식민지 시기에도 문예운동은 활발히 이루어졌다. 식민지 정책의 방향이 ‘민족 말살’로 치닫던 해방 이전을 제외하고는, 적어도 ‘조선어로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질문이 시대의 과제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조선은 유럽인이 야만인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면서부터 늦게나마 세계를 향한 수용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 과정에서 직접 교류할 수 없었던 국가들에 대한 왜곡과 답습, 비난과 예찬이 극적으로 나타났다. 일관된 목표는 ‘세계의 구성원’으로서 우리의 위치를 확실히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잘 알려진 대로 이때의 조선은 무엇 하나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하고, 결과적으로는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다. 또다시 성리학적 질서와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가 비난의 도마 위에 오른다. 하지만 통념과 달리 당대인들은 계속해서 국내외의 상황을 파악하고 어떤 방향으로 문명을 개척해 나가야 할지를 고민했다.

특히 근대문학의 흐름은 해방 이후 현대문학의 자양분이 되었다. 시간을 돌릴 수는 없지만 이 책은 맹목적인 비난에 가려졌던 당대 지식인들의 지적 도전과 고민을 보여준다.